처음 선생님을 만나게 된 계기가 생각납니다. 제가 불안장애와 불면증을 겪게 되면서였죠.
요 2년 사이, 다른 사람들처럼 코로나로 저 역시 손발이 묶였어요. 한 달에 수십 번씩 마음껏 뛰어놀던, 제겐 놀이터 같았던 공연장에 가는 일도 한 달에 한 번이 될까 말까였죠. 라이브클럽의 사장님들도 저를 보곤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고, 함께 일하는 스태프들도 언제 그만둬야 할지 모르겠다는 하소연을 하곤 했습니다. 밴드들의 수입이 줄어드니 저희 회사 또한 타격을 받았고 대표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지고 한숨만 새어 나왔습니다. 제 주변에 자영업자 친구들이 많은데, 어깨가 축 처져서는 꾸역꾸역 버티고는 있는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_ 13-14쪽(당연했던 일상이 무너진 후에)
저도 성우 씨를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제가 성우 씨의 얘기를 듣고 한 말을 정확히 다시 하면, “그렇다면 가수 할 필요가 없겠네요”였죠.
당시 제가 본 성우 씨는, 노래를 ‘잘’ 부르고 공연을 ‘잘’하는 가수가 ‘안 되면 어떡하지’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인정하듯 노브레인은 25년 넘게 노래를 한 우리나라 대표 록그룹인데, 노래를 ‘잘’하고 공연을 ‘잘’하고 싶다는 고민을 심각하게 하고 있더군요.
무엇을 ‘잘해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 못하고 있으니 현재를 버리고 혹은 바꿔서 다른 상태로 가야 한다는 압박에서 비롯됩니다.
_ 18-19쪽(당연한 것이 진실입니다)
직업과 신분에 상관없이 대인관계를 좋아하면서도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간에 보통 좋아하는 일이라면 즐겁고 쉬워야 하는데, 이 사람들은 대인관계를 좋아하면서도 어려워하죠.
그 이유는 대인관계에서, 자기와 상대하는 사람을 항상 기분 좋게 해야만 하고, 기분 나쁘게 하거나 불편하게 하면 자기가 큰 잘못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기 때문입니다.
_40쪽(대인관계의 완벽주의)
사실 우울증이나 불안증을 겪을 때 가장 힘든 것은 내가 무엇을 힘들어하고, 무엇 때문에 스트레스받고,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한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전문가이든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
사실 이렇게 번아웃에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힘들 때가 있죠. 그 이유는 내가 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말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에게 뭔가를 바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내가 이만큼 힘드니 나의 힘듦을 ‘환기’라도 해야겠다는 심정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_ 54-55쪽(일단 이야기를 꺼내보세요)
칼 구스타프 융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구조는 페르소나와 그림자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페르소나는 다른 사람을 상대할 때 나타나는 자기 모습을 말합니다. 그림자는 그 페르소나 밑에 숨어 있는 또 다른 나의 모습을 이야기하죠. 흔히 이 페르소나와 그림자가 반대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외부에 있는 사물과 현상들만 현실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속에 있는 자신만의 세계가 발현되지 못하게 무의식적으로 억누르고 있어요. 그러다 우연히 자신에게 반대의 성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두려움 없이 무작정 따라가보는 것이죠. (…)
가수 인생 평생을 록커로 살던 성우 씨께서도 어쩌면 그림자에 갇혀 있던 또 다른 형태의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것을 따라가고, 좋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감정의 폭발 때마다 느껴오던 불안함과 두려움이, 절제된 감정 표현과 짜인 각본 안에서 안전하게 예술 활동을 하는 아이돌을 보며 위로를 느낀 것이죠.
_ 159쪽(페르소나와 그림자)
전 제가 이 나이를 먹도록 결혼을 안 할 줄은 몰랐습니다. (…)
결혼이란 누군가와 일단은(?) 평생을 약속하는 것인데 아직 전 그 약속이 두렵습니다. 언제 헤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연애도 아니고 가족들과 친지, 친구들 앞에서 함께 산다고 선언하고 서류상에도 둘이 함께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남기는 게 보통일은 아니잖아요. 같이 살다 보면 안 보이던 단점들도 보일 테고 괜히 미울 때도 있겠죠. 그러고 보니 우리네 밴드랑 비슷하네요. 그러다 맘에 안 들면 밴드는 해체, 부부는 이혼!
_ 190-191쪽(1인가구의 기쁨과 슬픔)
노브레인은 정말 오랜 시간을 함께했어요. 저 역시 그렇지만 이렇게 오래 함께한 관계일수록, 상대가 ‘이 정도’는 알아챌 거라고 생각할 수 있죠. 이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
아이들이 산타 할아버지를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요? 바로 내가 가지고 싶은 선물을 기가 막히게 알아내서 주기 때문입니다. (…) 이 멋진 산타 할아버지는 결국 ‘표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아이는 한 번도 상상 속의 산타에게 어떤 선물을 가지고 싶다고 표현한 적은 없지만, 눈과 입, 몸으로 갖고 싶은 선물을 엄청 표현합니다. 그리고 부모는 아이가 사랑스러워서든 다소 귀찮아서든 그 시그널을 알아차리고 선물을 준비하지요.
그런데 이런 직관, 특히 오래된 직관은 간혹 오해를 일으킵니다. 정말 별것도 아닌 일로 가까운 지인 사이에 감정이 상하고 오해가 생길 수 있죠. 그것을 해결하는 좋은 방법은 큰 움직임, 명확한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하는 이야기에 크게 웃어주고, 고맙다, 훌륭하다, 같이하고 싶다 등 명확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마치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나도 모르게 큰 표현을 계속 내보내서 자기가 정말 갖고 싶은 선물을 갖고야 마는 어린아이들처럼 말이죠.
_ 211-212쪽(신호와 표현은 크고 명확해야 한다)
선생님과 이야기하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해도 나란 사람은 죽지 않고, 가지고 싶은 걸 갖지 못해도 나란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고요. 갖고자 발버둥 치거나 내다 버리고자 발버둥 치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일들이 무겁지 않게 느껴졌고 소소한 행복을 더 자주 느낄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저는 제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도 행복하고 기타를 칠 수 있을 때도, 노래를 부를 수 있을 때도 행복합니다. 록커인 제게는 당연한 일들이지만 그동안 너무 당연했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_ 320쪽(다시 찾은 행복)
헤세는 나방과 새를 통해 자아실현의 중간 단계를 표현했습니다. “나방이 자신의 뜻을 별이나 뭐 비슷한 곳까지 향하게 하려 했다면, 그건 이룰 수 없는 일이겠지. 다만 나방은 그런 따위 시도는 안 해. 나방은 자기에게 뜻과 가치가 있는 것,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 자기가 꼭 가져야만 하는 것, 그것만 찾는 거야.”
즉 헤세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일반 사람들을 화려한 나비가 아닌 나방으로 표현했습니다. 수선스럽게 자신의 본분과 목표를 잃어버리고 별을 쫓는 나비가 아닌, 소박한 목표를 향해 날아가는 나방 말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작게 만들었다는 지난날 성우 씨의 모습은 사자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지금 성우 씨의 모습은 헤세의 나방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일이나 특별한 이유 없이, 강아지들과 잔디밭을 구르다가 문득 행복을 느끼는 것만큼 소박한 게 또 있을까요.
_ 323-324쪽(Let it 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