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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래밍은 상상이다 - 싸이질과 케빈 베이컨의 6단계 게임

한빛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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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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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BIT

11,860

제공 : 한빛 네트워크
저자 : 임백준
출처 : 프로그래밍은 상상이다 제5장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사회 중에서"

‘싸이질’이라는 생소한 표현을 처음 접한 것은 얼마 전의 일이었다. 아내의 후배가 가족 홈페이지에 글을 남겼는데 자신의 홈페이지가 싸이월드라는 사이트에 마련되어 있음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주변에 아는 사람들이 하나 둘 동일한 사이트에 자신의 홈페이지를 마련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일부 대기업과 대학이 회사나 학교에서 싸이월드에 접속하는 것을 막기로 했다는 뉴스도 읽게 되었다. 그리고 싸이질은 싸이월드에 접속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은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뭔가 유행을 타면 그 기세가 무서울 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르는 한국적 특성을 고려하더라도 싸이질은 오늘의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주요한 코드가 된 것이 분명해 보였다.

도대체 그 안에 무엇이 있기에, 하는 궁금증이 일어서 싸이월드에 마련된 지인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았다. 아담하고 예쁘게 장식된 홈페이지에 일기장, 사진첩, 방명록 등의 기능이 편리하게 구성된 모습은 과연 훌륭했다. 그렇지만 기존의 홈페이지에 비해서 특별히 새로운 것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싸이질이 유행을 타게 된 이유를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필자의 눈에 보인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냉장고에서 꺼낸‘냉동만두’였고, 다른 하나는‘케빈 베이컨의 6단계(Six degrees of Kevin Bacon)’라고 불리는 게임이었다.

냉동만두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홈페이지를 만드는 일은 전문가들이 목돈을 받고 수행하는 프로젝트에 속했다. 하지만 지난 칼럼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홈페이지를 구성하는 파일을 올려놓을 컴퓨터 시스템을 제공해주는‘웹호스팅(web hosting)’서비스가 싼 가격과 함께 대중화되고, 제로보드와 같은 매우 편리한 무료 프로그램이 보급되면서 홈페이지의 제작은 더 이상 소수의 전문가들이 독점하는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 인터넷이 동작하는 원리를 어느 정도만 알아도 홈페이지를 만드는 일은 어렵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대중화된 웹호스팅 서비스와 제로보드는 이미 만들어진‘만두피’와‘만두소’에 해당했다. 예전에는 전문가들이 만두피와 만두소를 정육점에서 고기를 구입하고, 밀가루 반죽을 다듬고, 야채를 썰면서 처음부터 만들었지만, 이제는 누구든지 이미 만들어져 있는 만두피와 만두소를 구입해서 만두를 빚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문제는 남아 있었다. 만두를 만드는 과정은 예전에 비해서 매우 단순해 졌지만, 만두피와 만두소를 직접 빚어서 만두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래서 싸이월드가 제공한 것은 만두가 완전히 빚어져 있는‘냉동만두’였다. 홈페이지의 모든 기능과 틀이 이미 마련되어 있어서, 누구든지 와서 회원가입을 하면 곧바로 자신의 홈페이지를 가질 수 있도록 했다. 홈페이지가 갖추고 있는 기능은 손으로 직접 빚은 만두에 뒤지지 않으면서도 대단히 편리했기 때문에 자신만의 홈페이지를 갖고 싶지만 기술적인 장벽 앞에서 망설이던 사람들에게 싸이월드는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냉동만두의 대성공은 독창성과 자유분방함을 모토로 내세우던 사이버 공화국이 똑같은 물건을 하나의 판으로 찍어내는 현실세계의 대량생산 방식을 인정했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싸이질’의 유행이 설명되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이유였다.

케빈 베이컨의 6단계 게임

정재승이『정재승의 과학 콘서트』(동아시아, 2003)에서 소개한 케빈 베이컨의 게임은 이렇다. 영화에 함께 출연한 관계를 1단계라고 했을 때, 다른 할리우드 배우가 케빈 베이컨과 몇 단계 만에 연결되는지를 파악하는 놀이다. 예를 들어서“줄리아 로버츠는 덴젤 와싱턴과 <펠리칸 브리프>를 찍었고, 덴젤 와싱턴은 톰 행크스와 <필라델피아>에 출연했으며, 톰 행크스는 케빈 베이컨과 <아폴로 13호>에 함께 나왔으니, 줄리아 로버츠는 세 단계 만에 케빈 베이컨에 도달하게 된다.”

싸이월드에서는 이 게임에서 사용되는‘단계’를‘촌수’라는 개념으로 대체했다. 혈연에 민감한 한국 사람들의 특성을 포착한 변형된 6단계 게임이라고 볼 수 있다. 서로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일정한 등록과정을 통해서 바로 ‘일촌’이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서 서로의 네트워크가 통합되고 확장되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말하자면 만인에 의한 만인과의 관계 맺기라는 복잡한 양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나와 친한 일촌의 일촌은 나와 가까운 이촌이 되고, 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어느 누군가의 이촌이 되기도 하면서 관계는 무한정 확장된다. 결국‘인맥’이 쌓여가는 것이다.

기존의 대형 커뮤니티 사이트는 카페와 같은 형식의 공동체 공간을 집중적으로 제공한 반면에, 싸이월드의 핵심은‘나’라는‘개인’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인맥의 네트워크를 제공했다.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려는 개인의 욕구와, 인맥을 관리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운 한국 사회의 특수성이라는 조건 속에서 놀이와 인맥 쌓기가 결합된 싸이월드의 촌수 맺기 놀이는 대중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면서 하나의 사회 현상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보안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놀이이다. 또한 네트워크 지도에서 가뿐한 한 개의 선으로 표현되는 (종종 얼굴조차 모르는) 사람과의 관계는 진지하고 전면적으로 접근되어야 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대와 공동체 의식을 왜곡할 소지마저 안고 있다. 싸이월드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물론 대부분 가까운 지인들과 가볍고 편리하게 의사소통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출발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가벼운 의사소통이 시간을 두고 쌓이고 축적되면, 어느 누구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무거워지는 순간이 온다. 그때가 되면 사람들은 인터넷 광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모두 발가벗고 서있음을 깨닫고 놀라게 될 것이다. 싸이질,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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